철학독서

준비되기 전에 쓰기 시작하라

10 분 소요

한 문장과 하나의 생각 사이의 거리

독서를 하면서 메모를 쓰는 습관은 항상 있었다. 책 여백의 낙서, Obsidian 템플릿의 한 줄 응답. 습관 자체는 있었다. 하지만 짧은 반응을 적는 것과 종이 위에서 진짜 생각하는 것은 다르다.

짧은 한 문장은 쉬웠다. "흥미롭다"나 "X가 떠오른다"나 "동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동의하지 않는지, 정확히 무엇이 떠올랐고 그 연결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펼쳐 쓰려고 하면, 거기서 멈췄다. 좀 더 생각한 뒤에 쓰자. 정리하자. 좋은 관점을 찾자.

그래서 계속 생각했다. 또 생각했다. 그러다 그 생각은 사라졌다. 짧게 적은 여백 메모는 남았지만, 더 깊은 사고는 한 번도 종이에 닿지 못했다. 되돌릴 수도 없었다. 애초에 적어둔 적이 없으니까.

머릿속은 좋은 작업 공간이 아니다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것이 있다. 머릿속은 좋은 사고 공간이 아니다. 머릿속에서 생각은 명확하고 정돈되어 있고, 심지어 우아하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그걸 완전히 글로 옮기려 하면, 절반은 허공이었음을 깨닫는다. 여백에 적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그 순간에는 완전한 사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의하지 않는지를 세 문장으로 설명하려 하면, 할 수 없다. 이해한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이다.

글쓰기는 이것을 드러낸다. 불편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피한다. 멋진 아이디어가 있다는 기분에 머무르는 게, 펜을 들고 실은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 핵심이다. "이해했다"와 "설명할 수 있다" 사이의 거리, 바로 거기서 진짜 사고가 일어난다. 글쓰기를 건너뛰면 사고를 건너뛰는 것이다.

계획하지 말고, 그냥 시작하라

예전에는 글을 쓰기 전에 구조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개요, 프레임워크, 최소한 명확한 논지라도.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한 최고의 사고는 항상 지저분한 한 문장에서 시작됐다. "왜 이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혹은 "이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데, 아직 왜인지 설명할 수 없다." 논지가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거기서부터 더 많은 것이 나온다. 항상 순서대로는 아니고, 항상 일관되지도 않다. 하지만 종이 위에 글자를 놓기 시작하면, 이전에는 없던 생각이 나타난다. 글쓰기는 사고를 기록하는 게 아니라 사고를 만들어낸다. 문장을 만들어야 할 때, 머릿속에서 인상만 저글링하고 있을 때와는 뇌가 다르게 작동한다.

요즘은 뭔가에 막힐 때마다 빈 문서를 연다. 체계적인 노트도 프레임워크도 아니다. 그냥 자기 말로 문제를 서술하고, 뭔가 떠오를 때까지 계속 쓴다. 거의 매번 떠오른다. 글을 쓰는 행위가 만들어내는 연결은, 머릿속에만 있었으면 절대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미 이걸 안다"는 착각

자꾸 실패하는 테스트가 하나 있다. 최근에 읽은 개념 하나를 고른다. 이해했다고 느끼는 것으로. 그리고 그걸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설명해본다.

대부분의 경우, 못 한다. 명확하게는. 주변을 맴돈다. 저자의 말을 그대로 쓴다. 자기 말이 없으니까.

그게 착각이다. 그 아이디어를 접한 것이지, 이해한 것이 아니다. 이해하려면 가공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자기 말로 바꾸는 것. 그걸 확실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은 써보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간단한 조언이다. 나조차 절반밖에 따르지 못한다. 뭔가를 읽고, 고개를 끄덕이고, 똑똑해진 기분을 느끼고, 넘어간다. 일주일 뒤에 저자가 뭐라고 했는지 떠올리려 하면, 한 문장도 온전히 말할 수 없다. 정보가 나를 통과했을 뿐이다. 체에서 물이 빠지듯이.

도구는 당신을 구하지 못한다

완벽한 메모 환경을 찾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딱 맞는 앱을 찾으면 사고의 질이 올라갈 거라고 생각했다. Notion 데이터베이스, Obsidian 그래프, 온갖 커스텀 템플릿. 전부 써봤다.

배운 건 이것이다. 도구는 대신 생각해주지 않는다. 아름다운 연결 그래프가 있어도, 각각의 아이디어와 진지하게 씨름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래프일 뿐이다. 도구는 글을 담을 수 있지만, 대신 써주지는 않는다.

요즘은 최대한 단순하게 유지하려 한다. 도구는 적을수록 좋다. 도구를 고르고 설정하는 데 쏟는 에너지는, 실제로 사고하지 않는 에너지다. 시스템을 조정하는 시간이 그 안에서 쓰는 시간보다 길다면, 그게 신호다.

잘 쓸 필요 없다

글쓰기를 막는 가장 큰 장벽은, 나 자신을 포함해서, 잘 써야 한다는 기대다. 통찰력 있고, 독창적이고, 읽을 가치가 있어야 한다는.

다 잊어라. 쓰는 대부분은 평범할 것이다. 괜찮다. 발표하려고 쓰는 게 아니다. 소화하려고 쓰는 것이다. 머릿속의 모호한 덩어리를 눈에 보이고, 반박할 수 있고, 그 위에 쌓아갈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쓴 것 중 가장 유용했던 문장은 이런 것이다. "이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조차, 아무것도 쓰지 않는 편안한 침묵보다는 명확하다.

한 가지만

다음에 읽은 것이 마음에 남을 때, 한 문단이든 한 줄이든 계속 떠오르는 생각이든, 저장만 하지 말고. 빈 페이지를 열고 그것에 대해 써라. 못 써도 괜찮다. 반쪽짜리 생각이어도 괜찮다. "이게 나에게 무슨 의미인지 아직 모르겠다"라고 써도 괜찮다.

품질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자기 말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보가 나를 통과하느냐 내 일부가 되느냐의 차이는 바로 거기에 있다.

준비될 때까지 기다리지 마라. 준비되지 않을 것이다. 그냥 시작하라.